주요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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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의사

용암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충의사(忠毅祠)는‘농포 정문부’를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61호로 지정되어 있음. 농포 정문부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지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선조 26년(1953) 백탑교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기도 하였음.(이때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북관대첩비) 정문부는 병조참판까지 올랐으며 호는 농포, 시호는 충의(忠毅)임. 충의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3문을 갖추고 있음. 내부에는 장군의 유품으로 의복 1점, 교지 수십통, 환도 1점, 전적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가호서원이 위치함. 

■ 북관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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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북관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를 탁본한 북관대첩비 복제비로 이 북관대첩비는 원래 함경북도 길주군에 있었으나, 러일전쟁 중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이 패전기록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여 일본으로 뺏어갔고, 그후 일본황실에서 보관하다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져 최근까지 왜곡된 내용으로 전해 내려오다 2005년 남북이 공동으로 대첩비 반환을 강력하게 요청하여 반환이 이루어졌으며 반환된 대첩비는 원래 위치인 함경북도 길주군에 있다고 하네요. 지금의 충의사 대첩비는 문화재청이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해 북한에 요청해서 받은 탁본을 복제한 대첩비

■ 가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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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 경내에위치한 가호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문부(鄭文孚)를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당초 함북(咸北)에 있는 네 개의 사우에 향사하였다가, 1970년에 진주 향교 사람들의 공의와 선생 후손들의 협찬에 의해 현 위치에 사우를 건립.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신문, 5칸의 강당, 정문부장군유물전시관 등이 있으며, 별묘인 충의사는 영정을 모신 곳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강당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 옆에는 각 2칸의 방을 배치하였음. 현재는 매년 예절교육과
 및 인성교육장으로 활발히 활용되고 있음. 

■ 용암사지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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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지석불 함께 용암사 절터에 위치한 용암사지승탑은 보물 제 372호로써 높이는 1.93m, 재료는 화강암이며 사리탑의 지대석, 중대석, 탑신석 등은 파손되었다가 1962년에 원래 위치로 복원함.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 8각 하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겨 그 내부에 천부상을 조각했고, 이 윗면에는 경사를 이룬 가운데에 1단 낮은 굄이 있음. 중대석에는 원래 운룡무늬가 조각되어 있었으나 새로 만들어진 돌에는 우주만을 새겼음. 상대석은 윗면에 단판 연꽃잎이 양각되고 중앙에 3단의 받침이 마련되어 있음.

■ 용암사지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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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마을에 소장되어 있는 용암사지 석불은 경상남도 제4호로 등재된 유형문화재로, 고승의 사리를 모신 부도와 함께 용암사 절터에 남아있는 유일한 불상이며, 두건을 머리에 쓰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장보살을 표현한 불상으로 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독특한 도상은 현존하는 유사 작품이 거의 없어 희소성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용암사지 석불과 함께 용암사 절터에 위치한 용암사지 승탑은 보물 제372호로 어느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리탑의 지대석, 중대석, 탑신석은 파손되었다가 1962년 현재 위치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용암사는 통일신라 말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가 지리산 성모천왕으로부터 세 개의 암사(巖寺)를 세우면 삼한이 통일되어 전쟁이 그치게 된다는 계시를 받고 순천에 선암사, 금산에 운암사와 함께 여기에 절을 세웠다고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에 기록돼 있으며,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시대까지 무외 라는 스님이 있었던 기록도 있는 것으로 봐서는 고려시대까지는 사찰로서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

■ 은헌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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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마을에 소재하는 은헌고택(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345호)은 대한제국시대의 옛 한옥으로 지금과는 다른 공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한 문살과 실용적인 공간구성이 전통한옥에서 근현대로 변화는 과정을 살필 수 있어 한옥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되고 있으며, 지역민들을 위해서 덕행을 쌓은 가문의 내력과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더하고 있음. 또한, 당시 지주계층의 주거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건물이며 현재는 청주한씨 은헌공파 종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음. 

■ 고려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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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마을 뒤쪽 새우골 인근에 6.25 당시 고려장터로 추정되는 곳에 피난처를 마련하여 지냈는데, 그때 고려장터로 추정되는 숯과 그릇의 일부 발견되어 마을주민들이
 고려장터로 추정하고 있으나 고려장이라는 제도는 실제 우리나라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역사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장이라는 말이 나온 시점이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라는 점을 고려한다는 역사가 왜곡됐을 가능성도 있음. 

■ 국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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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곡마을회관 내 위치한 영봉정에는 농포 정문부의 무예를 기리기 위해 국궁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현재도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국궁대회 개최 및 국궁 활동이 활발히 운영 중에 있음.

■ 성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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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879년(헌강왕 5)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였으며, 도선은 우리나라의 국토를 풍수지리학의 입장에서 살펴본 결과, 백두산의 정기가 태백산맥을 끼고 내려오다가 한 지맥은 한강 이북인 서울 삼각산에 머물렀고, 한 지맥은 남강 물을 먹고 있는 여항산(艅航山)에 와서 맺혔음을 관찰하고 이곳에 암자를 창건하였으며, 이곳이 성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여 성전암이라 칭함. 그 뒤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나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가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이곳으로 피신하여 국난타개를 위한 백일기도를 올린 뒤에 등극하였으며, 암자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하여 인조각(仁祖閣)을 세워 오늘날까지 제향을 올리고 있음. 그리고 임금이 성전암에 머물렀으므로 절 아랫마을을 장안리(長安里)라고 하였음. 2010년 화재로 인해 대웅전, 나한전 등 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인조각과 대웅전의 목조여래좌상도 화를 면하였으나  이후 무량수전 등의 건물이 새로 건축되었으며, 현재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좌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0호로 지정됨.